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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September 25, 2020

“인생도 농사도 기다림입니다, 벼도 아이도 자립해야죠” - 한겨레

saoskalo.blogspot.com
[토요판] 커버스토리
농부과학자 이동현

미생물학 박사 출신의 농부
서울대 석사 거쳐 규슈대 유학
귀국 3년 만에 곡성서 농사 시작
벼 품종 연구와 발아현미 사업도

“먹거리 생산과정 잊지 않으려
귀한 시간 들여서 직접 농사”
“농부의 삶 감사히 받아들여서
국민 식량창고 끝까지 지킬 것”

이동현 대표가 지난 17일 오전 ㈜미실란 앞 들판에 있는 자신의 논에서, 긴 장마와 태풍을 이기고 풍년을 이룬 벼 이삭을 보며 친환경 생태농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이동현 대표가 지난 17일 오전 ㈜미실란 앞 들판에 있는 자신의 논에서, 긴 장마와 태풍을 이기고 풍년을 이룬 벼 이삭을 보며 친환경 생태농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전남 곡성에는 농부과학자가 산다. 발아 현미를 만드는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의 이동현 대표가 그다. 순천대 농대를 졸업한 뒤 서울대 석사와 일본 규슈대 박사가 된 미생물 과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에서 귀국한 지 3년 만인 2006년 서른일곱 젊은 나이에 농부가 됐다. 국내 학계의 높은 벽과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후순위로 택한 직업이긴 하지만, 그는 폐교를 가꿔 미래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 논에서는 친환경 생태농업을 하며, 마을에선 공동체 가꾸기에 열심이다. 또 집안에선 가장의 권위를 버리고 헌신과 사랑을 실천한다. 농사처럼 삶도 풍성하고 건강하다. 최근 김탁환 소설가는 이동현 대표에 관한 얘기를 책(<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으로 펴냈다. 지난 17일 김 작가의 책을 들고 곡성을 찾았다. 곡성읍에 있는 ‘미실란 밥카페 반하다’에서 6시간 동안 이동현씨 부부를 만나, 이들이 곡성의 논바닥에 그리고 있는 삶의 무늬를 들여다봤다.
“기다림이죠. 인생도 마찬가지지만 농사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다림을 모르거나 기다릴 여유가 없어 중도에 포기하고 말죠.” 지난 17일 전남 곡성에서 이동현(51) 농업회사법인 ‘미실란’ 대표(이하 호칭 생략)가 검거나 푸른 쌀은 검게, 흰쌀은 누렇게 색색으로 물들고 있는 그의 논을 가리켰다. 벼는 알곡의 무게 때문에 고개는 숙였지만, 긴 장마와 몇차례의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이웃 논의 벼 절반 정도가 쓰러져 누워 있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벼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튼튼하게 자라니까 어지간한 바람에는 끄떡도 없고, 병해충도 스스로 이겨냅니다. 땅이 이 정도로 생태적이 되려면 최소한 3년은 기다려야 하는데 보통은 그것을 못 기다리죠.” 우렁이와 각종 생물이 살고 있는 논을 찬찬히 둘러보는 사이 논 옆에 있는 ‘미실란 밥카페(cafe) 반(飯)하다’에서 아들 재혁(21)과 부인 남근숙(48)이 점심을 준비했다. 지난 8월 말 2차 코로나 위기 이후부터 밥카페는 문을 닫고 있어 당분간 이동현 가족만의 식당이다. 두부요리와 묵은김치찜, 양배추찜, 백김치, 된장국, 부추전 등 채식 반찬들이 정갈했지만, 유기농 현미를 발아시켜 지은 밥이 핵심이었다. 밥만 한술 떠서 오래 우물거리다 삼켰다. 다른 양념의 맛을 섞고 싶지 않을 정도로 밥맛이 구수하면서도 고소했다. 소설가 김탁환은 “밥알 하나하나가 탱탱하게 씹히며 다른 맛을 내고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반백 년을 밥상머리에 앉았지만, 이런 밥은 처음이었다”(<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고 표현했다. 맛도 맛이거니와 한그릇 깨끗이 비우고 나니 밥심이 불끈 생기는 것 같았다.
이동현 미실란 대표가 지난 17일 오후 연구실에서 삼광, 녹미 등 그가 키우고 연구 중인 벼 품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이동현 미실란 대표가 지난 17일 오후 연구실에서 삼광, 녹미 등 그가 키우고 연구 중인 벼 품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유엔 모범농민상 수상 미실란의 밥 한그릇에는 이동현의 세가지 정체성이 담겨 있다. 벼 품종을 연구 개발해(과학자), 모내기부터 벼베기까지 농사를 지은 뒤(농부), 스스로 개발한 발아기로 쌀눈을 틔우는(회사 대표) 땀의 결실이다. 유기농 발아 현미와 그 가공품을 만드는 회사인 미실란은 직원 11명에, 지난해 매출 9억원을 기록했다. 15년의 관록으로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그는 지금도 농촌진흥청과 벼 육종 및 재배 기술에 대해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그가 다른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발표한 벼에 관한 논문은 13편에 이른다. 주변 농민들과 계약을 맺어 유기농 벼를 제값 주고 사들이고 있지만 그는 지금도 약 3천평의 논에서 벼농사를 직접 짓는다. 2006년 곡성에 들어온 첫해부터 실천해온 친환경 생태농업이다. “농업회사도 회사니까 시이오(대표)가 거래처 사람들과 골프 등으로 어울리면서 물건을 잘 납품하면 매출이 더 올라간다는 것을 저도 알아요.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하지 않고 부족한 시간을 들여 농사를 짓는 것은 먹거리를 만드는 기본은 생산이기 때문이에요. 농부가 아니면서 농부인 척하게 되면 나중에 생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제품이 어떻게 나오는지 잊어버리게 되거든요. 그러면 저도 건방져져서 벼가 비싸면 수입해서 쓰자거나, 병해충이 심하면 계약 농민들에게 그냥 제초제 뿌리고 농약을 치자고 말하는 시이오가 되고 말 겁니다. 그런 걸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많든 적든 간에 최소한의 농사는 직접 지으면서 현장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농부로서의 땅에 대한 헌신과 사업가로서의 도전정신은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농업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를 지닌 대산농촌문화상을 수상(2015년)했으며, 지난해에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선정한 모범농민상을 받았다.
농부과학자 이동현씨는 지난해 9월 유엔식량기구가 주는 모범농민상을 받았다. 태국 방콕에서 상을 받은 뒤 부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동현 제공
농부과학자 이동현씨는 지난해 9월 유엔식량기구가 주는 모범농민상을 받았다. 태국 방콕에서 상을 받은 뒤 부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동현 제공
이동현은 사실 농부나 사업가 이전에 미생물을 이용한 농작물 병해충 방제 분야의 전도유망한 과학자였다. 2003년 일본 규슈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이미 7편의 논문이 ‘국제 과학 논문 색인’(SCI)에 오를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연구자로서의 창의성과 능력을 높이 산 지도교수 오바 미치오는 그에게 일본이나 미국에서 박사후과정(포스닥)을 마칠 것을 간곡하게 권유했다. 이동현은 넓은 세계에서 연구하고픈 생각도 있었지만, 하루빨리 고국에서 자리잡고 싶어 2003년 9월 귀국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로서는 현실적이고 절박한 선택이었다. “한국에 오면 대학에서 저를 서로 데려가려고 하는 등 환대받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귀국 직후 두 대학의 교수에 지원했다가 안 됐어요. 그 뒤에 들려오는 소리가 ‘너는 실적 평가는 100점이지만, 교수들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하고 학교 당국에도 어떻게 해야 한다. 좀 더 기다리면서 해보라’고 하더군요. 연구 외에 다른 것은 할 줄도 모르거니와 집이 너무 가난해서 기다릴 여유가 없었어요.” 이동현은 1969년 전남 고흥군 동강면 오월리 시골 마을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고흥군수가 부임하면 늘 인사드리러 찾아온 유학자 아버지는 새벽부터 밤까지 글만 읽었을 뿐 생활에는 무능하고 무관심했다. 산골짜기 밭을 혼자 일구는 등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의 도움으로 이동현은 벌교중을 거쳐 광주의 전남고로 유학했지만, 1학년 담임 선생님의 ‘촌놈 차별’에 방황한 뒤 1988년 후기 대학인 국립 순천대 농대에 입학했다. 1992년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간 뒤 박사과정까지 진학했지만, 곰팡이 독소 실험 과정에서 쥐를 죽여야 하는 게 너무 싫어서 자퇴했다. 다행히 그를 학자의 길로 이끌고 아꼈던 순천대 지도교수(고영진)가 규슈대에 추천해 2000년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유학을 갔다.
이동현 미실란 대표의 논은 아이들의 생태농업 체험활동 무대이기도 하다. 2016년 6월 이 대표가 논에 들어갔다 나온 아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동현 제공
이동현 미실란 대표의 논은 아이들의 생태농업 체험활동 무대이기도 하다. 2016년 6월 이 대표가 논에 들어갔다 나온 아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동현 제공
처음부터 유기농 생태농업 실천 시민으로서 마을 가꾸기에 앞장 음악회·전시회로 문화 꽃피우고 교육운동 참여로 공교육 개선 두 아이에겐 공부 강요 않고 스스로 살아가는 자립 강조 평등한 가족회의 매주 열어 소통과 대화로 문제 해결 현미 발아기도 직접 개량 규슈대 지도교수까지 나서서 사업 진출을 말렸지만, 생계가 급했던 그는 전공을 살려 순천에서 2004년 9월 미생물을 이용해 병해충을 방제하는 신약을 만드는 회사(픽슨바이오)를 창업했다. 신기술에 대한 특허를 받았으나 경험 부족 등으로 얼마 못 가 회사 문을 닫고 말았다. 새 길을 모색하던 그에게 발아 현미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고향(고흥) 마을의 한 귀농 농부가 스스로 만든 현미 발아 기계의 고장이 잦고 발아율이 낮자 농학박사인 이동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는 내처 기기 인수를 제안한 것이다. 전공 분야가 아니었지만, 이동현은 고심 끝에 친환경 농업과 쌀 소비 증진 등으로 농촌과 생태계를 살릴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 미생물에서 벼농사 및 현미 가공 사업으로의 방향 전환을 결심했다. 마침 그의 특강을 들은 곡성군수(고현석)가 폐교 및 논 임대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농부과학자의 꿈을 곡성에서 펼쳐볼 것을 간곡하게 청했다. 이에 그는 순천 생활을 정리하고 2006년 5월 8년 전에 문을 닫은 폐교(곡성동초등학교) 건물에 입주했다. “지금이야 마당에 잔디가 있고 건물도 정비됐지만, 처음 올 때는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건물 내부 곳곳에는 거미줄이 뒤덮여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곳이었죠. 지금 밥카페가 있던 자리에 컨테이너를 놓고 가족 4명이 살았어요. 8년 동안 비었던 자리에 갑자기 불빛이 있으니까 지나던 사람들이 저녁에 다가와서 들여다보기도 했어요. 그래서 아내가 더 무서워했죠.” 폐교 건물에 미실란 간판을 내건 이동현이 맨 먼저 한 일은 볍씨 278개 종을 골라 모를 키운 뒤 모내기를 한 일이었다. 논 1천평에 품종별로 한줄씩 손으로 일일이 심었다. 어느 품종이 어떻게 자라고 병충해에 강한지, 어떤 게 가장 현미 발아가 잘되는지, 맛과 기능은 어떤지 등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품종 연구는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으며, 올해는 북한 벼 5개 종을 포함해 모두 28개 종을 심었다. “북한 벼는 예전 농촌에서 재배하던 재래종처럼 다른 벼보다 키가 커요. 기후변화에 대비하기 위한 실험으로 북방계 벼를 키워보고 있는데, 남북정상회담이 다시 열리면 남쪽 벼와 북쪽 벼를 5종류씩 섞어서 지은 평화와 화합의 밥을 만찬장에 올리고 싶어요.” 이렇게 키운 벼들로 미실란 한쪽에 마련한 실험실과 발아실에서 현미 발아 실험을 계속했다. 그 결과 삼광벼가 현미 발아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발아기도 개량을 거듭해 특수 저온건조 발아법에 적합한 4호기까지 제작했다. 덕분에 까다로운 현미 발아율을 95%까지 높였다. 쌀눈이 붙어 있는 현미 자체로도 백미보다 영양학적으로 훨씬 뛰어나지만, 발아 현미는 맛이 좋아질 뿐 아니라 몸에서 소화 흡수도 훨씬 잘된다. “기능성이라는 말이 딱 맞지는 않지만, 이제는 당뇨에 좋은 벼 등 특수 품종 개발에 힘쓰고 있어요. 값싼 외국 쌀과 경쟁하려면 친환경 보급과 함께 좀 더 고급화된 쌀 생산이 필요하거든요. 또 우리 쌀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소비를 늘리는 일도 중요하고요.” 2015년에 ‘미실란 밥카페 반하다’의 문을 연 것도 우리 쌀을 알리고, 농민과 소비자 간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곡성에 올 때부터 밥과 떡이 있는 농가 레스토랑을 만들어 운영할 생각이 있었어요. 생태농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쌀 소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거든요. 그러나 식당 운영이 힘들잖아요. 그래서 집사람이 결심할 때까지 기다렸죠.”
이동현씨 부부는 곡성으로 이사한 2006년부터 매년 봄, 가을에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참가하는 ‘미실란 작은 들판 음악회’를 열고 있다. 2011년 5월에 열린 음악회에서 이씨 부부와 두 아이가 노래를 하기 위해 무대에 섰다. 이동현 제공
이동현씨 부부는 곡성으로 이사한 2006년부터 매년 봄, 가을에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참가하는 ‘미실란 작은 들판 음악회’를 열고 있다. 2011년 5월에 열린 음악회에서 이씨 부부와 두 아이가 노래를 하기 위해 무대에 섰다. 이동현 제공
“너무 사랑스러운데 왜 공부 강요해요?” 이동현은 농부, 과학자, 사업가로만 머물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 곡성군민의 한 사람이자 마을 주민으로서도 열심히 살고 있다. 귀국 직후부터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시민으로서의 활동이었다면, 곡성에 자리잡은 첫해 가을부터 매년 봄, 가을마다 한두차례씩 열고 있는 ‘미실란 작은 들판 음악회’는 마을 사람으로서의 자기 몫이다. 곡성과 인근 지역의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주로 출연하는 들판 음악회는 코로나19 때문에 규모가 줄긴 했지만 지난 5월 22회를 기록했다. 가을 추수가 끝날 즈음인 다음달 17일에도 창작 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음악회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또 밥카페 복도에는 미술가 등 지역 예술인들의 작품을 돌아가면서 전시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행사는 이동현의 짝꿍인 남근숙이 주도한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서인지 제가 어딜 가나 문화콘텐츠를 즐기고, 그런 게 없으면 직접 만들어요. 여기서도 모닥불을 피우고 싶었죠. 하하. 곡성에 와서 지역축제에 가보면 너무 술판 위주고 어른을 위한 행사더라고요. 그래서 가족 단위로 와서 남녀노소가 다 즐길 수 있는 문화행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해서 만든 게 음악회였어요. 중학교 때부터 꿈꾼 소원을 이뤘는데 애들 아빠가 전적으로 지원해줘서 가능했어요. 처음 5년간은 밥과 떡을 만들어 오시는 분들한테 다 대접했거든요. 또 출연자들이 다 재능기부를 했더라도 뭔가 사례를 해야 하는데 없는 살림에 남편이 그런 비용을 모두 허락해서 가능했죠.”
이동현 미실란 대표와 부인 남근숙 이사가 지난 17일 오후 전남 곡성군 곡성읍에 있는 ‘미실란 밥카페 반하다’에서 생태농업과 지역사회 문화활동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이동현 미실란 대표와 부인 남근숙 이사가 지난 17일 오후 전남 곡성군 곡성읍에 있는 ‘미실란 밥카페 반하다’에서 생태농업과 지역사회 문화활동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부인 남근숙 미실란 이사는 이동현 대표의 동반자이자 동지다. 두 사람이 2009년 가을 벼를 수확해 경운기에 싣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동현 제공
부인 남근숙 미실란 이사는 이동현 대표의 동반자이자 동지다. 두 사람이 2009년 가을 벼를 수확해 경운기에 싣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동현 제공
이동현과 남근숙은 곡성의 시민단체인 ‘곡성교육희망연대’에도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교육이 희망이 되는 곡성, 함께 지켜나가는 활기찬 지역공동체, 학생·교사·학부모가 교육의 당당한 주체”가 되는 것을 목표로 창립(2011년)한 교육희망연대에서 남근숙은 초대 사무처장(현재는 공동대표)을 맡았으며, 이동현은 기록 담당을 자임했다. 이 단체는 곡성중학교 교장공모제 실시(2011년)에 기여했으며, ‘곡성 교육 200인 원탁토론회’(2016년) 등을 열어 정책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또 학부모들이 학생들의 진로체험행사에 직접 참여해서 아이들과 대화하는 ‘사람책 콘서트’도 곡성중에서 열었다. “여기 와서 보니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많은 아이들이 광주 등 대도시로 전학을 가는 거예요. 교사들도 빨리 떠나려고 하는 등 중학교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았거든요. 자영업자 등 지역 주민들의 위기감이 컸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주민들이 나섰죠. 우리들 학부모끼리, 또 선생님들과 대화하면서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애썼어요. 일주일에 한번씩 아침 등교시간에 교장 등 선생님들과 학부모, 학생회 간부들이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사랑합니다’ 하고 인사했어요. 처음에는 ‘이게 뭐지’ 어리둥절해하던 아이들이 차츰 자존감이 높아지는 게 뚜렷해지고, 아이들 간 폭력도 거의 사라졌어요. 치맛바람이 세진다면서 싫어하던 선생님들도 우리 활동을 받아들이는 등 태도가 바뀌더라고요.”(남근숙) 남근숙은 순천에서도 상가 지역에서 나고 자란 까닭에 순천대 농대 임학과에 들어갈 때까지 손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살았다. 친구의 소개로 서울대 대학원을 자퇴하고 순천에 내려와 있던 이동현을 만나 1년 남짓 사귀다가 1999년 초에 결혼했다. 그는 아파트 생활이 익숙한 도시 사람이었지만, 곡성의 폐교로 이사하는 것을 반겼다. 당시 큰아이(재혁)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음에도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둘째 애가 아토피가 아주 심해서 흙에서 뛰어놀 수 있는 곡성이 아이에게 더 좋을 것이기에 잘됐다 싶었죠. 애들 공부 걱정이요? 그건 결혼 전부터 우리에겐 없었어요. 제가 대학원에서는 상담을 전공했는데 청소년 상담을 하면서 공부 압박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많이 봤어요. 부모들의 욕심 때문에 아이들을 망치고, 가족 전체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면서 아이를 낳더라도 공부를 시키지 않기로 남편한테 다짐을 받았어요. 하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지방대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공부한 사람이 가지기 쉬운 학력 콤플렉스를 아이들에게 전가할까봐 솔직히 걱정됐어요. 잘난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을 많이 봤거든요. 다행히 남편은 수용성이 아주 좋아서 제 의견이 맞다 싶으면 지금도 다 받아주고 실천해요. 공부만 빼면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운데 왜 공부를 강요해요? 하하. 우리는 사교육뿐 아니라 학교 공부도 강요하지 않았어요.”(남근숙) “곡성에 이사 와서 경운기를 맨 먼저 샀는데 읍내에 나갈 때 짐칸에 아내와 애들을 태우고는 오픈카 놀이를 했어요. 하하. 젊은 부부가 미친 모양이라고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는데 저 사람이 박사농부구나 하고 쉽게 저를 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아무튼 큰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까지는 대학에 안 가겠다고 해서 저희는 좋다고 했죠. 2학기가 돼서 다른 친구들이 다 대학 간다면서 자기도 대학에 가면 안 되겠느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죠. 뒤늦게 뒤처진 학습을 따라가느라 아이가 1년 남짓 고생을 많이 했죠.”(이동현)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의 대표인 농부과학자 이동현(왼쪽)씨가 지난 17일 오후 전남 곡성군 곡성읍에 있는 ‘미실란 밥카페 반하다’에서 부인 남근숙씨, 큰아들 재혁씨와 함께 사진을 찍으려 하자, 반려견 복실이가 자신도 끼워달라는 듯 다가오고 있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의 대표인 농부과학자 이동현(왼쪽)씨가 지난 17일 오후 전남 곡성군 곡성읍에 있는 ‘미실란 밥카페 반하다’에서 부인 남근숙씨, 큰아들 재혁씨와 함께 사진을 찍으려 하자, 반려견 복실이가 자신도 끼워달라는 듯 다가오고 있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아침밥은 아빠, 저녁밥은 아들이 공부 대신에 이들이 강조하고 신경쓴 것은 아이들의 자립심이었고, 부모의 모범이었다. 결혼 초기에는 서로 반말을 하다가 큰아이가 말을 배울 때부터는 존댓말로 바꿨다. 또 매일 아침밥을 이동현이 짓는 등 부부가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어느 순간부터 저녁밥은 대부분 두 아들이 준비한다. “2007년 어느 날 아침 새벽에 일어나 들판에 일하러 나가려고 하는데 아내가 악몽을 꾸더라고요.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싶어서 쌀을 씻어서 아침밥을 지어놓고 나갔다 왔더니 아내가 고맙다면서 평소 안 하던 뽀뽀를 해주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부터 계속 했죠. 하하.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식구들이 편하고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죠.”(이동현) 아이들이 사춘기에 들어갈 즈음부터는 가족회의를 주말마다 열었다. 방에 둘러앉아 서로 발을 맞대고 시작하는 가족회의에서 멤버들은 모두 평등하다. 좌장과 서기는 매번 가위바위보로 정하며, 발언하는 사람은 누구나 존댓말을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가족회의는 남근숙이 제안했고, 매 주말 빠짐없이 회의를 준비하고 실천한 것은 이동현이었다. “재혁이가 사춘기가 되니까 아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등 대항하려고 하더군요. 이때 부모의 권력과 힘으로 누르면 어긋나게 되죠. 그때 고민해서 생각한 것이 평등하게 진행되는 가족회의였어요. ‘재혁님, 얘기해보세요. 아, 그러셨어요. 그럼 기분이 상당히 나빴겠네요’라는 식으로 말하는 게 처음에는 우습고 그랬지만, 꾸준히 하니까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가족 간의 갈등과 문제를 대화로 풀게 됐죠. 지금도 아이들 진로 문제 등을 가족회의에서 결정해요. 재혁이 대학 진학 문제도 그렇게 결정했어요.”(남근숙)
농부과학자 이동현씨 부부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 대신에 자립심을 키워주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를 도왔다. 큰아들 재혁이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논에서 피를 뽑다가 잠시 포즈를 취했다. 이동현 제공
농부과학자 이동현씨 부부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 대신에 자립심을 키워주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를 도왔다. 큰아들 재혁이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논에서 피를 뽑다가 잠시 포즈를 취했다. 이동현 제공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한 뒤 기다려준 결과는 천천히 나타났다. 두 아들은 이제 부모의 조력자를 넘어 동지로 성장했다. 전남대 식물생명공학부(농대)에 재학 중인 재혁은 아버지 같은 농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으며, 같은 대학 생명과학기술학부(자연대)에 다니는 재욱(19)은 아버지가 걸었던 미생물 과학자의 길을 꿈꾸고 있다. 둘은 공부하는 틈틈이 예초기로 논두렁 풀깎기, 밥카페 앞 나무데크 깔기, 미실란 창고 페인트칠하기 등 크고 작은 집안일에도 앞장선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논에 들어가서 피뽑기를 했던 형제에게 노동은 자연스러운 일과다. “농대를 선택할 때부터 명확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농업에 대한 기초를 배우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주위 환경이나 부모님을 보면서 평소 이렇게 살면 좋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농업과 농부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올해부터입니다.”(이재혁) “올해는 코로나 등으로 두 아들이 집에 있어서 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요. 올해 같으면 농사를 더 지어도 될 것 같아요. 하하. 큰아들이 앞으로 미실란을 잇겠다고 하니까 저는 둘째와 함께 미생물 연구를 본격적으로 다시 하고 싶어요. 일본에서 암세포를 죽이는 미생물 연구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연구를 하려고요. 그 생각 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어요. 우여곡절 속에서 제 인생의 폭이 넓어졌기에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만, 전공 분야 연구에서 멀어져서 아쉬움이 있었거든요.”(이동현) 그러나 이동현의 뿌리는 생명이 꿈틀대는 논에 굳건히 박혀 있다. 앞으로도 그는 이 땅의 농부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농부입니다. 죽는 날까지 잘할 자신은 없습니다. 작은 힘이지만 농부의 삶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국민의 식량창고, 식량주권 지키는 데 늘 현장에서 고민하고 기록하고 지켜가겠습니다.”(이동현 페이스북. 2020년 8월27일) 곡성/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농부과학자 이동현 미실란 대표는 현미 발아기를 개량해왔다. 자신이 개발한 발아기 앞에서 지난 17일 이 대표가 현미 발아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농부과학자 이동현 미실란 대표는 현미 발아기를 개량해왔다. 자신이 개발한 발아기 앞에서 지난 17일 이 대표가 현미 발아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전남 곡성군 곡성읍에 있는 농업회사법인 ㈜미실란과 ‘밥카페 반하다’의 전경. 폐교였던 곳을 이동현 대표가 2006년에 이주해 가꿨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전남 곡성군 곡성읍에 있는 농업회사법인 ㈜미실란과 ‘밥카페 반하다’의 전경. 폐교였던 곳을 이동현 대표가 2006년에 이주해 가꿨다. 곡성/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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