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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November 18, 2020

"아빠가 엄마 죽일까봐 참았어요" 학대받던 아이를 구한 건···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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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9 06:00 입력 2020.11.19 09:4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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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한 컵’ 때문이었다. 4월의 어느 저녁. 굳게 닫힌 문 뒤에서 다섯 살 하윤이(가명)는 아버지에게 맞아 쓰러졌다.

좋아하는 동물컵에 담긴 우유를 마시고 싶어서, 하윤이는 남동생과 다퉜다. 친모 A씨가 “같은 우유인데 그냥 먹으면 안 되냐”고 말할 때 계부가 귀가했다. 평소에도 감정 기복이 심했던 계부는 자신의 아들을 A씨가 차별한다고 오해했다. 계부는 화를 내며 A씨와 하윤이를 폭행했다.

하윤이를 때려 넘어뜨린 계부는 하윤이에게 성학대를 시도하려 했다. A씨는 계부에게 빼앗긴 휴대전화를 되찾아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 이후 조사과정에서 그동안 계부가 A씨 몰래 저질러 온 수많은 학대가 드러났다. 아이는 계부의 협박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계부는 아동학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매년 3만~4만 건의 아동학대가 신고된다. 수만 명의 하윤이들이 지금도 닫힌 문 뒤에 있다. 아동학대 사건 보도는 공분을 일으키지만, 관심은 자극적 피해와 처벌에만 집중된다. 관심이 식을 때쯤이면 다른 학대가 보도된다. 패턴은 반복되고, 해결은 멀다.

가장 첫 단계로 돌아가보자. 끝없이 반복되는 학대의 고리에서도 최소한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동학대는 누군가의 신고로 처음 알려진다. 모든 신고가 해결까지 이어지지는 못하더라도, 모든 해결은 신고에서 시작됐다.

경향신문은 19일 아동학대 예방의 날을 맞아 ‘신고’에 집중했다. 신고자들의 결심과 고민, 신고 후에 벌어진 일들을 들었다. 신고자들의 정보 보호를 위해 이름·지역 등은 익명 처리했다.

아동학대를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것의 첫단추는 ‘신고’다. 아동학대는 가정사가 아니라 사회적 영역에서 모두 함께 감시하고 예방·해결해야 할 문제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아동학대를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것의 첫단추는 ‘신고’다. 아동학대는 가정사가 아니라 사회적 영역에서 모두 함께 감시하고 예방·해결해야 할 문제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아빠가 엄마를 죽일까봐” 아이는 학대를 참았다

하윤이의 친모 A씨는 신고를 후회하지 않는다. 하윤이를 학대한 계부와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다. 두 번째 이혼이 되겠지만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더 크다. 신고할 때도 망설이지 않았다. 프리랜서인 A씨는 일을 줄이고 치료시설과 수사기관, 법원 등을 바쁘게 오간다. 후회라면 아이가 힘들다는 것을 먼저 알아주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신고 이후에야 비로소 숨겨진 학대가 드러났다. 계부와 분리된 곳에서 하윤이가 입을 열었다. 상습범이었다. 계부는 숱하게 하윤이를 때리고 꼬집고, 성적으로 학대했다. A씨 앞에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학대는 주로 닫힌 방문 뒤에서 이뤄졌다. 하윤이는 말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말하면 엄마를 죽이겠다”는 계부의 협박이 무서웠다고 했다. 한 차례 부모의 이혼을 겪었기에, 말을 꺼내면 부모가 또 헤어질 것 같았다고 했다.

다행히 하윤이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기관의 도움으로 병원 진료를 받았다. 민간 심리상담센터와 연계해 심리치료도 진행 중이다. 가끔 우울해하거나 감정 기복을 보이지만, 당찬 성격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아빠가 엄마를 죽일까봐” 꾹 참던 아이가 지금은 수사와 치료에도 적극 협조한다.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편인 하윤이는 “나쁜 일이 생겨도 좋은 사람들이 도와줄 수 있다는 걸 안다. 희망을 갖고 나중에 멋진 사람이 되겠다”고 A씨에게 다짐했다.

■친한 지인의 아동 방임, 고민됐지만 놔둘 수는…

전화기를 들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B씨는 지난해 말 친한 지인 C씨를 ‘아들을 방임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기관에 신고했다. 우연히 C씨의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설거지는 가득 쌓여 있었고, 방마다 가득 찬 잡동사니 때문에 아이는 거실에서 생활했다. C씨의 아들 현이(가명)는 또래에 비해 많이 말랐다.

신고가 쉽지는 않았다. C씨와의 친분 때문이었다. B씨가 신고했다는 것을 C씨가 알게 되면 관계가 끊어질 수 있었다. 고민을 거듭했지만, 그때마다 현이의 퀭한 눈과 마른 몸이 계속 떠올랐다.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아이가 지낼 만한 환경이 아니에요. 아이가 너무 불쌍해요. 애 좀 구해주세요.” B씨는 신고를 하면서도 “내가 신고했다고는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 나와 관련된 이야기도 하지 말아 달라”며 신신당부했다.

신고 후에 밝혀진 사실들은 심각했다. 홀로 아들을 키우는 C씨는 술을 마시느라 집을 자주, 오래 비웠다. 1주일에 한 번 들어갈 때도 있었다. 현이는 심각한 게임중독에 빠졌다. 온라인 수업은 출석버튼만 누르고 12시간씩 게임을 했다. 식사도 컵라면 등으로 대충 때웠다.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가 열어본 냉장고 안 반찬은 대부분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전형적인 ‘방임 학대’였다.

신고는 실질적인 ‘도움’으로 이어졌다. 기관의 개입으로 현이는 게임중독 치료를 받고 있다. 기관은 C씨에게 생활고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서비스를 소개해줬다. C씨는 술을 줄이고 구직 의욕을 보이는 등 달라졌다. 기관 담당자는 “두 사람 모두 처음엔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는 등 개입을 거부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고 연락도 잘 된다”며 “아직 조금 더 지켜봐야 하지만 기대를 걸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동학대, ‘비신고의무자’는 없다

아동학대 신고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다. 아동권리보장원의 ‘2019년 아동학대 주요통계’를 보면, 지난해 아동학대 신고 3만8380건 가운데 교사·아이돌보미 등 ‘신고의무자’에 의한 신고는 23%(8836건)에 그쳤다. 77%(2만9544건)가 이웃이나 친인척 등 이른바 ‘비신고의무자’의 신고였다. 가장 적극적인 신고자는 ‘부모’로 전체 아동학대 신고의 17.0%(6506건)를 신고했다. 아동 본인에 의한 신고도 12.4%(4752건), 이웃·친구의 신고도 4.5%(1718건)로 적지 않다. 신고 건수로만 따지면 아동보호전문기관이 1만2389건(32.3%)으로 가장 많지만, 이 중 대다수는 신고가 들어온 학대가정을 조사 및 관리하다가 새로 발견한 재학대·형제학대 등이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이 다른 학대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최초의 신고’도 대부분 평범한 이들의 신고였다.

"아빠가 엄마 죽일까봐 참았어요" 학대받던 아이를 구한 건···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학교·복지시설 등이 닫히면서 주변인들의 적극적인 신고가 더 중요해졌다. 이미 올해 아동학대 발견이 예년보다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아동권리보장원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올해 1~8월 아동학대 의심 신고 건수는 2만5994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1812건 줄었다. 이동건 전국아동보호전문기관협회장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학대 피해를 인지하고 신고를 할 수 있는데 올해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었다”며 “아동학대를 가장 빨리 인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결국 주변의 가족이나 이웃, 친인척이다. 가까이서 아동학대를 인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예민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동학대 앞에 ‘비신고의무자’는 없다고 말한다. 시민 모두의 적극적인 신고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권태훈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복지기획팀장은 “아동학대가 개인의 영역이나 가정사라는 인식이 많다. 사회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영역이라는 인식이 부족하다”며 “신고의무자의 신고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른들도 CCTV처럼 주변을 보다가 학대를 발견하면 신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이네처럼 학대 신고가 가정에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동학대 신고가 반드시 처벌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아이도 부모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훈련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교육 등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10월19일부터 11월17일까지 일반 시민 111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절반 가량인 49.5%는 아동학대 관련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신고와 관련된 교육은 58.6%가 받은 적이 없었고, 직장에 학대 예방·신고 관련 홍보물이 있냐는 질문에도 61.2%가 ‘없다’고 응답했다. 권 팀장은 “신고의무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학대 예방 교육이 더 확대돼야 한다. 직장에서 하는 성희롱예방교육처럼 의무교육으로 지정한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사기관의 인식 개선도 중요한 과제다. 지난 10월 서울의 한 병원에서 온몸에 멍이 든 채 실려온 16개월 유아가 사망했다. 앞서 3번이나 학대 의심 신고가 접수됐지만 별다른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밝혀지면서 경찰의 대응이 부실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 교수는 “연구에 따르면 검찰과 경찰, 법원 등 법 집행자들의 아동학대 심각성 인식은 일반인보다 낮다. 그들이 다루는 다른 중범죄에 비해 아동학대를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아동학대 사망은 예측요인이 없다. 모든 학대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아동학대에 대한 민감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지옥같은 고통 벗어나려면

A씨는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다른 하윤이들’을 생각한다. 학대당하는 다른 아이들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지난 4월 남편의 폭력에 저항하며 몇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이웃 누구도 신고하지 않은 경험이 생생하다. ‘나와 아이가 이대로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A씨는 “남들이 봤을 때는 ‘남의 가정사’라 생각하니 신고하질 않는다. 자기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아동학대도 ‘훈육’이라 넘기거나, 집안 망신이라며 묵인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동학대를 목격한 사람들이 용기를 내서 신고했으면 좋겠어요. 신고해서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요. 이겨내는 과정 자체가 아이의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이죠. 묵인하면 피해아동은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살다가 사라질 수 있어요. 어른들이 먼저 아이들의 손을 잡아줘야 해요.”

10월의 어느 날, A씨와 하윤이가 손을 잡고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하늘에 노을이 졌다. 하늘을 보던 하윤이가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린 줄 알았어요. 그 아저씨(계부)가 내 방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한참 생각하던 하윤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이 결국 내 기도를 들어준 것 같아요. 사람들이 도와줘서 너무 좋아요.” A씨는 오는 성탄절에 집에서 두 자녀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같이 볼 계획이다. 당찬 소녀 주인공이 모험 끝에 행복해지는 디즈니 만화를 하윤이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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